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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능력검정시험] 8·15 광복과 통일 정부 수립 노력
넵튜너스
2022. 3. 22. 22:07
[한국사 능력 검정시험] 8·15 광복과 통일 정부 수립 노력
1. 8·15 광복과 정치 상황
- 광복 직전 건국 준비 활동
대한민국 임시 정부 | 활동 | 1940년 충칭(중경)에 정착, 광복 이후 독립 국가 수립을 위한 건국 준비 |
강령 | 민족의 자유와 독립, 민주주의 국가 건설 등의 강령 발표 | |
조선 독립 동맹 (1942) |
활동 | 중국 옌안(연안)에서 김두봉 등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 세력이 건국 준비 |
강령 | 민주 공화국 수립, 남녀 평등, 토지 분배, 대기업 국유화 등의 강령 발표 | |
조선 건국 동맹 (1944) |
활동 | 국내에서 여운형이 좌우 세력을 연합하여 건국 준비 |
강령 | 민족의 자유와 독립, 민주주의 국가 건설 등의 강령 발표 |
- 8·15 광복과 38도선의 획정
(1) 국제 사회의 한국 독립 약속
- 카이로 회담(1943) : 한국을 적절한(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키기로 결의
- 포츠담 회담(1945) : 한국의 독립을 재확인
(2) 8·15 광복(1945) :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 결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 승리
(3) 38도선의 획정 : 일본군 무장 해제 구실로 미국의 제안을 소련이 수용
(4) 미·소군의 진주 : 38도선을 경계로 남쪽에 미군, 북쪽에 소련군이 주둔 - 광복 직후 국내 정치 상황
- 38도선 이남 : 미군정의 직접 통치→일제 강점기 관료·경찰 유지, 정부 표방하는 세력 불안정
- 38도선 이북 : 소군정의 간접 통치→공산주의 정권 수립 지원, 민족주의 인사 대거 숙청
(1)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결성(1945. 8.)
- 결성 : 여운형과 안재홍 중심의 좌·우 연합(조선 건국 동맹을 모태로 함)
- 활동 : 전국에 지부 설치, 치안대 조직→조선 인민 공화국 선포(1945.9.) 이후 해체
(2) 우익과 좌익
- 우익 : 송진우·김성수 등이 한국 민주당 조직, 김구 등 대한민국 임시 정부 인사 귀국, 이승만 등이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 결성
- 좌익 : 박헌영 등이 조선 공산당 재건(이후 남조선 노동당으로 개편) -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1945.12.)
(1) 결정 : 민주주의 임시 정부 수립, 미·소 공동 위원회 설치, 최고 5년 기한 4개국의 한반도 신탁 통치 결정
(2) 반응 : 반탁 운동 전개(우익), 반탁에서 총체적 지지로 선회(좌익)→좌우 대립 격화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 시기 : 1945년 12월 - 장소 :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 - 참석 국가 : 미국, 영국, 소련 - 목적 : 한반도 문제를 포함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전후 처리 문제 논의 |
2. 통일 정부 수립 노력
-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1946.3.~5.) : 임시 정부 수립 참가 단체를 둘러싼 대립으로 무기한 휴회
- 이승만의 정읍 발언(1946.6.) : 38도선 이북의 소련 철퇴 및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수장→한국 민주당의 지지
※이승만의 정읍 발언※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 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한만이라도 임시 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다. |
- 좌우 합작 운동(1946~1947)
배경 | 신탁 통치 문제로 좌·우익의 대립 심화→우익 측에서 단독 정부 수립 움직임 등장 |
주도 세력 | 중도 우파 김규식과 중도 좌파 여운형 중심의 좌우 합작 위원회 결성→미군정의 지원 |
활동 | 토지 개혁 실시, 친일파 처리 등 좌우 합작 7원칙 발표(1946.10.) |
결과 | 좌·우 세력의 불참, 여운형의 피살(1947), 냉전 체제 격화에 따른 미군정의 지원 철회 등으로 실패 |
- 한국 문제의 유엔 상정
배경 | - 제2차 미·소 공동 위원회(1947.5.~9.)의 결렬 - 냉전 체게로 미·소 대립 구도 심화 |
과정 | 미국의 한국 문제 4대국 회담 상정 주장→소련의 거부→미국의 한국 문제 유엔 상정→유엔 총회의 결의(일구 비례에 따른 남북한 총선거 실시안 가결, 1947.11.)→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 내한(소련은 위원단의 입북 거부)→유엔 소총회의 '위원단이 접근 가능한 지역의 총선거' 결의(1948.2.) |
- 남북 협상(1948.4.)
배경 | 남한만의 단독 선거 움직임 |
과정 |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 지도자 회의 제의→평양에서 남북 지도자 회의 개최(1948.4. 김구·김규식 참여)→남북한 제 정당 사회 단체 지도차 협의회 공동 성명 발표(외국 군대 즉시 철수, 남한 단독 선거 반대, 조선 정치 회의 구성을 통한 총선거 등) |
결과 | 특별한 성과로 이어지지 못함→김구는 5·10 총선거 불참, 이후 피살(1949.9.) |
8·15 광복과 통일 정부 수립 노력 요점 정리 끝.